'기분으로 먹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짜장면(GOD), 바나나(<검정고무신>), 그리고 기내식...... 기억에 방부제를 뿌리는 건 내용이 아니라 맥락이었습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은 기내식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은 작가의 여행 에세이입니다. 작가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내 인생의 무미건조함에 관해 자문하게 됩니다만 한편으로는 새로 떠날 여행에 기대를 걸게 합니다. 기내식 고프게 한달까요. 좋은 글과 사진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여러분의 기내식은 어떤 기분을 담고 있나요.
아래 인터뷰를 읽으며 곰곰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INTERVIEW
🎈 정은
🎁 정은 || 《산책을 듣는 시간》으로 2018년 사계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산문집《커피와 담배》등을 썼다.
🎱 『기내식 먹는 기분』. 특별한 제목입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 어떤 기분인가요.
🎁 기내식과 똑같은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으면 아마 망할 거예요. 맛으로만 따지면 기내식이 맛있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런데도 항상 기대가 되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기내식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흥분된 마음 아래에 감춰진 핵심은 죽음에 대한 공포고요.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살면서 죽음을 의식하게 되지는 않지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시속 800킬로로 하늘을 날고 있으면 죽음의 가능성을 한 번쯤 생각하게 되고, 그때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도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은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기분입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 수록 사진 (모두 정은 작가 촬영)
🎱 살아 있는데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운 아이러니. 어질하네요. 이 책은 15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한두 달을 생활인처럼 지내다 온 기록이기도 합니다. 여느 여행 에세이와는 사뭇 달랐는데 다른 제목후보도 있었다고 하네요.
🎁 제목 후보 중에 '나를 보러 갔었어'가 있었습니다. 여행은 다른 동네를 구경하러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와 거리감을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나도 나의 일부는 내가 떠나온 곳에 남아 있게 됩니다. 가까이에서는 잘 안 보이던 것이 거리가 생길 때 잘 보이고 알게 됩니다. 매번의 여행에서 나에게서 내가 아닌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고 세공하듯이 점점 나인 것만 남게 됩니다. 여행은 나와 거리를 둠으로써, 내가 정확한 내가 되도록 스스로를 찾아가는 작업인 것 같아요.
내가 나 자신과 함께 있다고 할 때 그건 어떤 영혼적 관점이니까 물리적인 공간과는 상관이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내 생활 공간'과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었을 때 내가 나를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걸 자기 객관화라고도 하죠. 처음으로 날짜 변경선을 지나 다른 나라의 도시에 있을 때, 내가 나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나 자신을 들여다본 것처럼 자기 객관화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여행은 먼 땅에 거울을 하나 만들어 두고 오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자기 객관화. 말하자면 사진 같은 것일까요. 비슷한 듯 다른 얘기일 텐데 작가님의 수동 카메라 덕에 저희는 가보지 않았거나 갔어도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끝내 담지 못한 장면이 있나요.
🎁 '누군가의 눈빛'이요. 카메라에 정말 담고 싶은데 늘 실패하는 것이 '눈빛'입니다. 눈빛은 아무리 카메라에 담으려고 해도 다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땐 1초라도 더 오래 보고 기억 속에 남기는 것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미노에서 에리히와 개의 모습을 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지만 전 생애를 통틀어 단 한 시간 정도만 마주 볼 수 있는 인연이었다면, 그 시간을 사진 찍는 데 낭비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생각합니다. 눈빛과 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 기억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여러 가지 심상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는 '공간이 건네는 말'이 잘 '들리는 듯'했는데요. 아마 작가님이 잘 옮겨 주신 덕분일 거예요.
🎁 영화를 전공해서 친구들하고 단편 영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공간의 사운드를 녹음하고, 촬영하는 작업을 하면서 빛과 소리 등에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촬영할 때는 '앰비언트'라고 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공간의 자체음을 따로 녹음합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것 같아도 그 공간의 기본음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 영향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감각에 관해서라면 작가님의 첫 책 『산책을 듣는 시간』을 빼놓을 수 없지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에 관한 명저로서 제16회 사계절문학상을 받은......『기내식 먹는 기분』에는 작가님의 첫 책 『산책을 듣는 시간』의 모티프가 된 장면들이 실제로 나와 전작의 애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책에 보면 순례길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된다는 친구의 말이 나오는데요, 그게 실현된 걸까요.
🎁 순례길을 걷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싶지만 이렇게 작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산책을 듣는 시간』의 많은 장면들은 그 길에서 만난 장면들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지만, 인생 자체가 순례길이라고 생각하면, 살면서 제가 만난 사람들, 많은 순간들이 모두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산책을 듣는 시간』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그래서 순례길을 걷든 말든 누구나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스페인과 인도를 지나 미국을 돌고 다시 여기 한국으로 돌아오는 흐름입니다.'지상에서 발이 조금 떠 있는 상태로, 유령처럼 서성이는 마음'에 기거할 자리를 마련해 준 '합정동 359-33번지' 이야기 또한 인상적이었는데요. 작가님께 '커피발전소'란 어떤 의미인가요?
🎁 커피발전소는 말 그대로 땅에 조금 떠 있던 제 발을 땅바닥에 붙여주었습니다. 커피발전소에서 일한 이후로는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환대의 마음으로 저를 받아 준 곳이고, 제가 저의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기분이 들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공간 자체가 좋은 친구였던 것 같아요. 커피발전소가 문을 닫고서 몇 달은 마치 특수복을 잃어버린 히어로처럼 힘이 빠진 채 지냈습니다. 덕분에 명상을 시작했지만요. 현실의 공간 없이도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살 수 있도록 내면을 다지고 있습니다.
🎱 뿌리 깊은 나무가 되시길 바랄게요. 아쉽지만 이만 마무리할 타이밍입니다.『기내식 먹는 기분』은 비행기 티켓 4장 값을 주고 읽어도 아깝지 않을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틈새 퀴즈! 북뉴스 하단 참조. 힌트는 질문에 있습니다.)특별히 읽기를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 예전의 저처럼 유령처럼 서성이는 마음을 가진 분들, 땅 위에 발이 0.1밀리미터 정도 떠서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지도 못하고 어디 한 군데 정착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 시간을 서성거리는 사람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슬아슬해지는, 가서 붙잡아 줘야만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그분들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거든요.
COMMUNITY
새해를 여는 북뉴스. 새로운 마음을 담아 독자 피드백에 다시 피드백을 남깁니다.
✍ mean 님
몰아치는 일의 폭풍 사이에서 문득 시간이 멈춘 것 같았거든요. 뭐랄까,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가시라 씨가 배고픔을 느낀 순간처럼? 북뉴스를 보며 정신차리고 보니 오늘이 직장에서 근무하는 2022년의 마지막 날인데, 폭풍 속 비바람을 함께 견딘 그들을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쩜. 쩜. 쩜.
해를 보내면서 누군가의 소식과 편지를 기다리는 것의 즐거움과 기대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북뉴스 덕분이에요.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비슷한 마음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복은...... 좀 빼고 받으시길. 감사합니다.
🎱: <고독한 미식가>는 저도 좋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쩜. 쩜. 쩜. 이것은 아마도 프로그램의 시그니처 연출인 듯한데 독자님이 생각하는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그것과 같을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씨에게 대단한 점이 있다면 우선 엄청난 식욕이 있고, 다음으로는 여유인 듯합니다. 배가 고프면 반드시 밥을 먹어야만 하는 이노가시라 씨에게는, 배고플 때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는 남다른 여유가 있습니다. (바빠서 먹을 수 없다? 그러면 슬픈 미식가가 되는 거죠.)
안 물어보셨다면 죄송합니다. 올해는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을 때 가는 여유 내지는 자유가 독자님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 피드백 감사합니다.
정은 작가님 : )
여러분의 기내식은 어떤 맛이었나요. 그리고 그것을 먹고 도착한 곳은 어디였나요? 기내식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휴게소의 유니짜장, 버스터미널의 기계우동, 기차 한솥도시락 등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틈새 질문에 대한 답도 함께 남겨 주세요!)
추첨을 통해 다섯 분에게 『기내식 먹는 기분』과 함께 정은 작가님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구성한 엽서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엽서책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