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 이상의 시간차를 가진 우리로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햇볕도 닿지 않는 어두운 동굴의 깊숙한 곳까지 어른거리는 기름 등잔을 들고 들어가 화려하고 역동적인 벽화를 그렸던 이유, 유럽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도달했던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곳곳에서 동굴벽화와 암각화를 남긴 이유, 뼈를 갈아 피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동굴 안에서 음악을 연주했던 이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많은 장신구들을 사용했던 이유…. 그동안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런저런 가설들이 제시되었을 뿐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것들이 나타나던 무렵부터 인간은 ‘물리적 세계’가 아닌, ‘정신적 세계’라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벽화가 그려진 깊숙한 동굴은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였을 것이다. 이것을 일종의 신화적 상상력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견해들도 있다.
그들만의 상상력이 충만하게 구현된 일종의 가상 세계 안에서 그들은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도 재정립하였을 것이다. 그때의 그곳은 그들만의 신화가 창조되는 순간이자 공간이었을 것이다. 수만 년 전 그렇게 조용히 시작된 그들의 가상 세계는 문명이 번성하는 지금도 여전히 곳곳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신화의 버전만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또 그때와 달리 지금은 깊숙한 동굴을 찾아 들어갈 필요 없이, 실감 넘치는 메타버스로 구현된다. 지금도 인간은 각자의 신화적 세계를 꿈꾸고 동경하고 있다. 아직 미흡하지만, 지금 우리가 구현하고 있는 현대의 혼합현실(MR)들 중 일부는 어쩌면 과거 그들이 꿈꾸던 신화 속 세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호모 사피엔스들은 전 세계로 삶터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도저히 갈 수 없었던 혹독하게 추운 극지방까지 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빙상으로 연결된 베링해를 지나 광활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깊은 바다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대부분의 섬들까지 도달했고,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광활한 세계인 해양자원에 눈을 뜨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물속에 던져진 뼈낚시와 그물에 물고기가 걸려 올라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망망한 설원 저편, 바다 건너 아스라이 보이는 낯선 땅 … 아마 상상할 수 없었다면 결코 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그것에 닿고자 애써 고안해낸 도구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문화적으로는 회화, 음악, 상징, 기호 등이 한꺼번에 등장하였고, 기술적으로는 전에 없던 분야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정교하거나 거대한 도구들이 출현하였다. 한편 어로와 정착, 곡물의 재배와 마연 기술 등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변화들도 조금씩 확인된다. 지금부터 약 4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 사이에 나타난 이러한 특징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명과 문화의 ‘출발점’ 혹은 ‘버전 1.0’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 신체 진화와 도구 발달의 에너지가 일종의 유의미한 임계점에 도달했고,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지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석 자료와 고고학 자료는 지금까지 최소 20여 종 이상의 고인류들이 나타났다가 멸종했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구를 개발하고 개량했음을 보여준다. 발전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시간이 갈수록 더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진화의 역사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도구의 역사는 발전론적 관점에 부합한다. 다른 종이 계속 출현했지만 앞선 종들의 지식과 정보가 연속적으로 축적된 것은 그들 간의 관계가 배타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누적의 결과로 현대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이전의 어떤 조상들도 갖고 있지 않았던 매우 특별한 재능을 갖게 되었다. 바로 길고 긴 과거의 시간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가깝게는 인간이 발명한 기호나 문자로 기록된 정보를 확보했고, 멀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와 우주의 까마득한 역사까지도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인류가 앞서 살았던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멸종의 길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그러한 능력 덕분이다.
고고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인간과 자연을 깊이 탐구하여 거둔 성과 중 하나가 “우리는 반드시 멸종한다”라는 명제임은 자못 아이러니하다. 짧디짧은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영속하는 유전자의 삶 역시 일개 종 유전자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나 일개 종 유전자의 생애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현재를 이루고 있는 토대의 일부가 되어 있음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미 소용을 다하고 버려진 수만 년 전의 보잘것없는 돌조각, 뼈피리나 조가비 목걸이, 황토 안료 덩어리 등은 지극히 소중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서툴고 조악한 시작이었지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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