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동물이 살아가는 도시. 인간을 제외하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규모로 관찰할 수 있는 종은 비둘기가 유일한 듯합니다. 그만큼 가까운 동물이지만, 비둘기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많지 않아 보입니다. 『도시의 동물들』, 여섯 번째 글. 비둘기를 다룹니다.
비둘기 : 비둘기는 하늘의 쥐
내가 중학생 때 나온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1집 앨범 제목이다. 당시 메탈 소년이었던 나에게는 너무 진보적이고 말랑했다. 비둘기에게 하늘의 쥐라고 한 것도 영 별로였다. 세월이 흐르고 다시 들어보니 음악은 참 좋은데 왜 저런 제목을 지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저 음악인에게는 두 종의 어떤 공통점이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비둘기를 하늘의 쥐라고 하는 것은 비둘기와 쥐를 한꺼번에 멸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시에서 사람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사는 것이 두 존재를 묶어버릴 정도로 중요한 공통점인가?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과하게 먹이를 만들어낸다. 창고에 쟁여둔 식량은 기업의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수시로 폐기하고,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물은 다른 동물의 중요한 식량이 되다 못해 처리 가능한 용량이 포화되어 쩔쩔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쓰레기’라고 부르며 역할을 부여하지 않은 이토록 풍만한 유기물에, 스스로 옮겨 다니는 비인간동물이 모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사람을 따라 이동한 쥐와 비둘기도,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은 고양이와 개도, 야생에 살 것 같지만 인간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음식물 찌꺼기의 유용함을 학습한 멧돼지와 너구리도 도시가 배출하는 막대한 양의 영양 물질에 의존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멧돼지를 ‘덩치 큰 너구리’라 부르지 않는다.
인간과 가까운 동물의 이름은 쉽게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은 쥐로 불렸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닭으로 불렸다. 도시의 비둘기가 살이 쪄서 잘 날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 닭과 비둘기를 합친 ‘닭둘기’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이는 도심의 환경이 비둘기에게 자주 날아올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지상에서 위험 요소만 살짝 피하는 것이 더 효율적임을 깨닫게 했기 때문인데, 굳이 게으름이나 비만 같은 인간의 사회적 개념을 갖다 붙이곤 한다. 게다가 A4 용지 한 장 크기도 안 되는 철제 케이지 안에서 날개도 못 펴는 형편에 점점 나는 능력을 잃어가는 닭을 비둘기를 멸시하는 용도로 이용한 것이다.
쥐도, 비둘기도, 닭도 인간이 그들을 무어라 부르건 신경 쓰지 않지만, 인간이 멋대로 부여한 동물의 이미지는 동물의 존재를 왜곡한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은 인간과 동물이 관계를 형성할 때 편견을 강화하는 힘을 갖는다. 비둘기를 하늘의 쥐라고 부를 때, 그들 각자의 고유성은 지워진다. 쥐는 쥐고 비둘기는 비둘기다. 무역선에 곁달려 한반도에 도달한 뒤 개체 수가 많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동물이 된 그들에게 가져야 할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조금 미안한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