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아시아의 구석기 시대 예술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대표하던 당대의 예술 외 인도네시아나 호주 등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이 예술들을 상호보완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하며, 가장 오래된 것이 무엇인지 따지는 차원에 머물면 안 된다는 말을 전합니다. 모름지기 본질은 속단과 편견을 경계할 때 보입니다. 『말랑한 고고학』 다섯 번째 글.
오늘은 좀 낯설 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의 구석기 시대 예술이다. 아시아에 구석기 시대 예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구석기 시대 예술은 곧 유럽의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 이미지들과 동의어일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간의 유럽 중심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 연구 성과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선입견일 것이다. 오늘은 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시대 예술에 대해서 최소한의 지식을 챙겨보도록 하자.
최근 들어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지역은 아시아의 남쪽에 있는 해양 국가 인도네시아이다. 여러 섬들로 구성된 인도네시아는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 해수면 변동을 비롯해 대규모 환경 변화를 여러 차례 경험한 지역이다. 지금은 해수면이 높아져 사라진 대륙 ‘순다랜드Sundaland’는 아프리카를 출발해 동쪽으로 이동하던 고인류들에게 주요한 경로였을 것으로 간주되는 지역이다. 인도네시아는 그 경로에서 호주 대륙으로 연결되는 중간 기착지였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중요한 고고학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최근 다수의 동굴벽화가 발견되고 있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 섬 역시 그러한 고고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호주 그리피스Griffith 대학의 막심 오베르M. Aubert 연구팀은 술라웨시의 남서부 지역 수백 개의 석회암 동굴들 중 일곱 곳에서 벽화를 찾아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벽화들 중 일부는 1950년대 네덜란드 고고학자 헤렌 팜H. Palm 등에 의해 이미 알려져 있던 것이다. 다만 발견 당시 신석기 시대 이후의 그림으로 오판되며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채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중 최근 벽화에 대해 연대 측정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 구석기 시대의 그림으로 판명되면서 전 세계 동굴벽화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림1. 안료 가루(왼쪽에서부터 황토, 숯, 망간, 방해석, 석고의 가루)]
석회암 동굴은 외부로부터 물이 공급되는 한 꾸준히 성장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만일 특정 시기에 벽면에 그림이 그려졌고 그 위를 새로운 석회 생성물이 덮었다면, 안료 위 석회 생성물 연대를 측정해서 그림이 그려진 최소한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우라늄 계열U-series 연대 측정법은 이런 환경에서 생성된 석회층의 연대 측정이 가능한 기술이다. 이를 통해 술라웨시 동굴에서 유럽의 동굴벽화보다 더 오래된 것들을 발견했고, 그 결과가 언론을 통해 자극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유럽에서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벽화는 스페인의 엘 카스티요El Castillo 동굴의 ‘손 프린팅’이다. 대략 4만 500년 전 무렵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술라웨시 레앙 테동게Leang Tedongnge 동굴에서 측정된 연대는 그보다 5000년가량 더 오래되었다(4만 5400년~4만 6400년 전). 아시아의 이 새로운 연대를 유럽 연구자들이 받아들이려면 좀 더 많은 자료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유럽에도 6만 년이 넘었다고 추정되는 벽화들이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어디가 더 오래된 것이냐의 논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유럽의 동굴벽화를 보면서 들었던 의구심은 ‘지나치게’ 잘 그렸다는 것이다. 기술이든 문화든 대개는 출현기의 어수선하고 조악한 단계가 있고, 뒤이어 발전기를 거쳐 전성기의 화려하고 세련된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잡한 쇠퇴기의 모습을 보여주게 마련이다. 이에 비해 유럽의 동굴벽화는 거두절미하고 갑자기 ‘전성기스러운’ 모습만 뚝 잘라서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유럽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출현기의 조악한 벽화들이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연대가 술라웨시보다 빠를 수도 있다. 즉 인도네시아에 있는 ‘유럽보다 이른 시기의 벽화’들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수용되고 상호보완적으로 연구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술라웨시의 동굴벽화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레앙 테동게Leang Tedongnge 동굴에는 최소 4마리 이상의 야생 돼지와 엉덩이 가까이에 손 프린팅들이 남아있다. 야생 돼지는 지역 고유종인 술라웨시 워티피그의 유사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검붉은색의 안료를 사용했고, 좀 더 밝은색으로 등줄기를 따라 긴 털을 강조하고 있다.(그림 1) 이 그림을 덮고 있는 얇은 석회층에서 4만 3000년∼4만 6000년 전이라는 연대가 측정되었다. 한편 이곳에서 가까운 레앙 발랑가지아Leang Balangajia 동굴 역시 야생 돼지와 손 프린팅이 남아있다. 그림으로 묘사된 야생 돼지의 크기는 몸길이 1.1미터에서부터 2미터에 이른다. 그림의 기법은 유럽의 벽화들과는 사뭇 다른데, 면을 칠하지 않고 길쭉한 선들을 촘촘하게 그어가며 입체감을 표현했다. 곧고 짧은 선들에서 야생 돼지의 빳빳한 털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상당히 인상적이다. 한편 마로스 팡켑Maros Pangkep 동굴에는 물소의 일종인 아노아Anoa와 다수의 손 프린팅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와 가까운 호주 대륙의 북동부에도 동굴벽화들이 남아있다. 아넘랜드Arnhem Land 지역의 동굴과 바위그늘에서는 대략 4만 년 전 무렵으로 추정되는 벽화들이 발견되고 있다. 지역 고유종인 캥거루와 일부 태즈메이니아 호랑이Thylacinus cynocephalus와 같은 멸종된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지역의 그림들도 대부분 붉은 계열의 안료를 사용했고, 면을 칠하기보다는 많은 선들로만 묘사하고 있다. 그림 기법은 벽화 제작자들이 인도네시아 지역과 유사한 집단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구석기 고고학을 전공하고 전기 구석기 시대 뗀석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도 양구군 상무룡리 유적 발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구석기 연구를 시작했으며, 그 밖에 제주도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서귀포시 생수궤 등 여러 발굴에 참여했다.
1996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박물관 업무를 시작했으며, 이후 유물관리부와 고고부, 전시팀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며 관련 저술과 전시로 활동을 넓혔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국립나주박물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최초의 진화 인류학 특별 전시 〈호모 사피엔스: 진화∞관계&미래?〉(2021년 5~9월) 등을 주관했다.
지은 책으로 구석기 시대에 관한 한국 최초의 교양 입문서 『단단한 고고학』,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사용한 도구를 연구한 『한국 구석기 시대 석기군 연구』와 『한국미의 태동 구석기·신석기』(공저), 박물관 큐레이터와 큐레이터 지망생을 위한 실용적인 유물 관리 지침서 『박물관 소장품의 수집과 관리』 등이 있다.
『말랑한 고고학』 5화입니다. 모든 글에서 교훈을 찾는 태도는 물을 마실 때마다 물의 효용을 검색해 보는 것처럼 덧없는 일일 것입니다. 담백한 독서를 이어가다가 보면 언젠가 책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라이프 해킹의 수단으로 책을 읽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에 『말랑한 고고학』과 같은 글을 꾸준히 읽는다는 건 독서를 아주 진지한 삶의 방식으로 여긴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함께 읽어나갈 독자를 기다리며, 피드백 답합니다.
👀: 독자 | 🎱: 담당자
👀 찰리보라운
다들 그럴 거 같은데 이메일을 열어보는 건 어쨌든 직장인들이잖아요. 직장인들이 『말랑한 고고학』을 읽을 때 느끼는 바는 대체로 비슷할 것 같아요. 구석기 시대 사람보다 할 줄 아는 게 없는 현대의 나......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찰리보라운 님. 입고 먹고 쓰는 것 중 현대인이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이산화탄소 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독자님의 말에 웃지만 한편으로는 제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지난번에 이어 피드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