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새로운 연재
VOL.109 사계절 시리즈: 봄
『끝내 이기는 말들』 정여울 연재 7화
단어, 문장,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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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도배된 배경에 지우개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여백 또는 침묵을 만듦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단어나 문장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침묵이나 행간의 여백까지 읽어내야 한다."
보이지 않거나 말해지지 않는 것을 대강 '넘겨짚지' 않고 제대로 '알아차리는' 문해력은 "서로를 위해, 세상을 더욱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해, 더 이상 말 때문에 상처받고 말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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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기도 하지.” 아주머니가 속삭인다.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 집에 맡기지 않을 텐데.”
―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중에서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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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文解力)’의 ‘문(文)’은 글이나 문장을 뜻하지만, 우리는 때로는 단어나 문장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침묵이나 행간의 여백까지 읽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침묵의 빈칸을 통해 ‘그 상황에서 미처 할 수 없는 말들’을 그리는 연습을 한다. 어떤 침묵은 절묘하고 아름답다. 침묵이 있기에 그 문장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런데 어떤 침묵은 미친 듯이 서럽고 아프다.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정작 그 사람은 묵묵부답일 때. 우리는 그 침묵이 이별의 통보라는 것을 이해한다. 공적인 글들 속에도 수많은 침묵과 여백이 서려 있다. 구구절절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없기에 생략하는 문장도 많고, 완전히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냉철한 단어들만 쓸 때도 많다.
신문 기사, 성적표, 알림장, 부고 등 수많은 글들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수많은 진실들’이 숨어 있다. 진실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은 침묵하고, 생략하고, 에둘러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이토록 수많은 침묵을 읽어내는 문해력이 필요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문해력 수업이 필요하다. 배려 없고 존중 없고 예의 없는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우리에게는 서로를 위해, 세상을 더욱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해, 더 이상 말 때문에 상처받고 말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상 속의 문해력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
한자어나 어려운 단어들을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기성세대들은 당황하면서 “어떻게 이런 단어도 모를 수 있나” 하고 한탄한다. A가 “우리 집은 종갓집이야”라고 했더니 B가 “우리 집은 아파트야”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상 속에서도 상대방의 의중을 오해하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를 보여준다. “종갓집이 뭐지?”라고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이런 기막힌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문해력의 발전은 시작된다. 모르면서도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해버릴 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수 있다. ‘무운을 빕니다’에서 ‘무운(武運)’을 ‘무운(無運)’으로 오해하는 차원의 독해력은 ‘모르는 단어’를 배우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포기해버릴 때, 공동체의 의사소통은 위기에 빠진다. 국민이 무지해질수록 권력자들은 손쉽게 통제력을 발휘하여 국가를 ‘힘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아무리 편파적인 뉴스라도, 아무리 권력에 찌든 언론이 만들어낸 왜곡된 기사라도, ‘우리가 제대로 읽어내고 해석하는 능력’만 있다면 기자의 심리는 물론 언론의 부패 정도까지 제대로 가늠해낼 수 있다. 세상에 도착한 문장이 제대로 완성되는 순간은 ‘작가가 문장을 끝내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가 문장을 이해한 순간’이다. 문장은 작가에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문장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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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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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여백 속에 깃든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최고의 훈련 방법은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다. 긴 작품을 읽기 힘들다면 우선 짧고 흥미로운 작품을 읽어보자.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과묵하거나 무뚝뚝하다. 다정함을 표현할 때조차도 매우 조심스럽다. 그들의 대화를 찬찬히 읽고 있으면, 그 문장과 문장 사이에 ‘해설’을 넣고 싶어질 정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뛰어난 작가는 그렇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과도한 수다를 떨지 않는다. 이 소설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추천사는 클레어 키건의 간결한 문장력을 이렇게 칭찬한다. “키건은 지독하게 경제적인 작가다. 이 소설의 모든 말 없는 여백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매기 오패럴) “모든 문장이 문체와 감정을 어떻게 완벽하게 배치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힐러리 맨틀, 맨부커상 수상 작가) “작가는 언제 머뭇거려야 할지 잘 알고, 아무 수확 없이 그렇게 하는 법이 절대 없으며,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는 절대 겁을 먹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한다.”(리처드 포드, 퓰리처상 수상 작가) 과연 이 소설의 어떤 침묵과 여백이 독자들을 이렇게 감동시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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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쓰는 사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듣는 사람.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 곁에 서려는 사람. 어두운 시대, 버릴 수 없는 희망의 잉크를 가득 머금은 글을 쉼 없이 쓴다. KBS라디오 ‘이다혜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드뮤즈’,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을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끝까지 쓰는 용기』 『공부할 권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헤세로 가는 길』 『빈센트 나의 빈센트』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마흔에 관하여』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월간 정여울』(전 12권) 『마음의 서재』 등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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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가는 시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여러분 곁에 항상 사계절출판사가 있기를 바라며 피드백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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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 🎱: 담당자
👀: 회사에서 작가님 글 보면서 힐링받네요. 오늘 나눠주신 선배님의 예쁜 말을 보며, 낯간지러운 말들이 왜 이렇게 듣기에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 말을 잊지 않고 나눠주셔서 문장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먼저 언어를 포착하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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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여러분, 천천히 읽어주세요. 그리고 연재를 읽고 드신 생각이 있다면, 또 정여울 작가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후기에 남겨주세요. 이전에 주신 기대의 말들은 잘 전했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 또 전하겠습니다. 짧게나마 남긴 말들도 상상 이상의 커다란 힘이 될 거예요. 책은 독자가 완성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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