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빈민가에서 살지 마십시오.”
― 수전 손태그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두렵다. 거리낌 없이 말을 할 수 있을 때, 누군가 내 말을 온 마음으로 들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전해지며, 행복해지며, 충만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런데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할 말이 없다’는 상황이 늘어간다. 유구무언, 어처구니없음, 할 말은 생각나지만 주변의 얼어붙은 분위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말을 해야 하기에 내 가슴속의 온갖 분노와 슬픔이 버무려진 솔직한 말이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그 사람이 상처받을까 봐 차마 가슴 아픈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이 모든 현실이 ‘할 말이 없다’는 상황의 일종이다. 비평가 수전 손태그는 ‘언어의 빈민가에 살지 말라’는 멋진 경고를 했다. 언어의 빈민가, 바로 그런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발언권이 위협당하는 상황이고, 말 못 하는 슬픔이 북받칠 때다. 경제적 빈곤만큼이나 무서운 빈곤, 그것은 바로 언어의 빈곤인 것이다.
‘언어의 빈곤’의 반대 상황은 무엇일까. 바로 ‘경청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상황, 어떤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드높은 문해력을 갖춘 사람들로 둘러싸인 상황이다. 무슨 말을 해도 잘 흡수되고, 어떤 말을 들어도 곧바로 이해되는 신명 나는 상황이다.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살맛이 난다. 문해력이 뛰어난 데다가 공감 능력까지 뛰어난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면, 우리의 재능과 잠재력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비상한다. 또 하나 바람직한 순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환한 돌파구를 열어줄 때다. 속 시원하게 ‘사이다 발언’을 해주는 사람이 꽉 막힌 상황을 풀어줄 때다. 그렇게 사이다 발언에 능통한 사람들은 보통 ‘뛰어난 경청자’이기도 하다.
공동체 전체의 문해력을 높여주는 사람은 본인도 말을 잘하지만 타인의 말을 아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뛰어난 연사보다도 뛰어난 경청자가 많아질 때, 사회는 더 나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좋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마치 진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내 소박하거나 의미 없는 말까지도 하나하나 다 들어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내 친구로 남아 있다. 좋은 정치인은 고통받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훌륭한 음악가는 자기만의 음악 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음악 소리, 청중의 한숨 소리까지 들어낼 줄 사람이며, 뛰어난 독자는 저자가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행간의 여백’까지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문해력의 관건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수용자’의 힘, 능력, 태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글로는’ 구구절절 잘 떠드는 나조차도 ‘언어의 빈곤’에 갇힐 때가 많다. 개인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는 ‘공동체의 문해력’이 위기에 처할 때인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언어의 풍요’를 느끼지만, 공동체 전체에서는 ‘언어의 빈곤’을 느낄 때가 많다. 공적 담론에서 보이지 않는 검열이나 은근한 압력을 느낄 때가 많은 것이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정말 내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말은 이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나의 말을 용인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솟아오르는 것은 작가로서 심각한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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